실재의 경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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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스페이스 휴는 2026년 3월 25일부터 4월 28일까지 기획전 〈실재의 경계에서〉 제1부 전시 〈이미지와 텍스트의 경계에서〉를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적 성취와 미학적 성과를 되짚으며,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온 중장년 작가들이 문자·행위·드로잉·설치·미디어 등 다양한 영역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개척해온 지속적인 예술 실천의 가치와 그들이 이뤄온 성취를 전시공간에서 새롭게 마주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이 전시는 202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지원사업으로 선정된 <실재의 경계에서>프로젝트의 일환으로, 3월 25일부터 10월 13일까지 총 4부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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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이미지와 텍스트의 경계에서_주재환, 김광우_2026.3.25-4.28

주재환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실험미술·개념미술·민중미술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 원로 작가다. 일상의 사물과 언어를 전유해 사회 모순을 유머러스하게 비틀어내는 그의 작업은 경쾌한 형식 속에 날카로운 시대통찰을 품고, 한국미술의 표현 지평을 넓혀왔다. 김광우는 현대미술이론을 깊이 연구한 평론가이자 작가로, 회화의 본질을 ‘얼룩’으로 규정하며 진부한 물질의 변용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제안한다.

두 작가의 작업은 2025년 ‘띵찰’ 전시에서 시작된 명찰 형식의 실험에서 확장되었다. 주재환은 명찰이라는 일상적 텍스트 프레임을 통해 사회적 기능을 해체하고, 무심히 지나친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대를 꿰뚫는 이미지를 호출하며, 김광우는 그 위에 얼룩과 비정형 이미지를 덧입혀 텍스트를 흐트러뜨린다. 이 과정에서 텍스트는 시각적 무의식을 침투하고 이미지는 언어적 구조를 재배치하며 경계를 오간다. 관람자는 고정된 읽기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유쾌한 해석과 마주하게 되고, 이들 작품 앞에서 우리가 외면해온 현실과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세태를 천천히 되새겨보게 된다.

이번 전시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경계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며, 재료의 물성이나 진부한 관념들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두 작가의 의도와 그것이 오늘의 동시대성과 맞닿는 지점을 주목한다. 이러한 태도는 두 원로 작가의 경쾌하고 명랑한 예술정신을 상징하며, 무거운 사유를 일상의 재료로 풀어내 동시대 미술의 생동감을 드러낸다. 김광우가 이를 “묵상의 회화 Meditative Paintings”라 명명한 바와 같이, 작품은 오래 바라볼수록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은 한없이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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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언어와 신체의 경계에서_날개, 윤진섭_2026.5.6-6.9

날개는 이번 전시에서 기술과 예술, 그리고 문자의 조형성이 결합된 파격적인 실험을 선보인다. 그는 벽면에 부착된 ‘스파이더 형태의 로봇’이 스스로 드로잉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작가의 신체를 대신한 기계의 움직임이 어떻게 새로운 예술적 흔적을 남기는지 탐구한다. 이 로봇 드로잉은 정교하게 설계된 타이포그래피의 질서와 기계적 우연성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의외의 미학적 지점을 드러낸다. 이와 함께 선보이는 액션 페인팅 작업은 절제된 기하학적 형태와 물성이 강조된 페인트의 질감을 통해 문자의 본질적인 구조를 재해석한다. 날개(안상수)는 한글 서체 개발을 통해 한국 디자인의 지형을 바꾼 성과를 넘어, 이제는 로봇 기술과 회화적 실천을 융합하며 현대미술의 문맥 안에서 문자를 생동하는 실체로 전이시킨다. 그의 작업은 ‘쓰는 행위’가 기계와 인간,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어 어떻게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로 확장되는지 증명한다.

실험예술가이자 비평가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해온 윤진섭은 기성의 작품과 일상의 사물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현실의 관념을 독특하게 비트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특히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특유의 위트와 해학으로 풀어내며 현대 자본주의와 물질주의가 낳은 소유의 욕망, 그리고 그로 인해 소외된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사유의 중심에 둔다. 윤진섭은 사물이 지닌 물리적 실체인 신체와 그것을 규정하는 이름인 언어 사이의 느슨한 틈을 파고들어, 관습적인 명명법을 전복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오브제 작업과 퍼포먼스적 요소들 역시 이러한 연장선에 있다. 일상적 소재를 전유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모순을 유머러스하게 폭로하는 그의 작업은, 언어가 지닌 관념의 틀을 신체적 직관과 해학으로 해체하며 동시대 미술이 지녀야 할 날카로운 통찰과 생동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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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일상과 자연의 경계에서_전원길, 김순임_2026.6.17-7.21

김순임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The Unknown Edible Beauty〉라는 주제로 자연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드로잉과 콜라주, 영상 작업으로 선보인다. 작가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자연 환경과 그곳에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천착하며, 거기서 발견된 서사를 특유의 자연 오브제와 엮어내는 ‘직조자’의 역할을 자처해 왔다. 전시장을 찾는 관객들은 작가가 도시의 아파트에 살며 상가 작업실을 오가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견한 자연의 긴밀한 기록들을 목격하게 된다. 대형마트의 밝은 조명과 전산시스템 속에서 매끈하게 포장되어 마치 공산품처럼 소비되는 음식들 속에서 현대인들이 망각해온 음식 고유의 ‘생명성’에 작가는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작가는 우리가 먹고 버린 흔적을 천천히 오래 들여다보고 만지며, 그 촉감과 시각적 형태에 시간과 마음을 더해 종이 위에 기록했다. 2017년 독일 와이너리에서 포도 껍질을 드로잉 북에 붙이며 시작된 이 즉흥적인 사색(Reading Grapes)은 타이페이, 미국 코네티컷, 울산, 부산을 거쳐 현재의 작업실에 이르기까지 정주지가 바뀔 때마다 먹고 버려지는 재료들의 미감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참외씨나 해바라기씨를 말려 형태를 만들고, 차를 우리고 남은 부산물로 그려낸 드로잉과 콜라주, 이들의 소멸 과정을 담은 영상 작업은 관람객에게 “우리는 생명을 먹는 생명이며, 이 일상 또한 자연의 거대한 순환”이라는 묵직한 미학적 메시지를 던진다.

전원길 작가는 색채를 사물과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감각 현상이자 인간의 눈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감각의 막(Membrane of sensation)’으로 정의하며 평면 및 설치 작업을 전개해 왔다. 특정한 사물의 색으로부터 출발하는 고유의 작법을 유지하면서도, 사물과 색을 분리하고 형상을 기하학적으로 변주하는 전위적인 실험을 선보인다. 이번에 관객들이 마주할 작품 〈생성공간(Space Emergence)〉 시리즈 5점은 하나의 화강암에서 발견한 5개의 색채에서 출발했다. 돌을 촬영한 후 포토샵에서 최대한 확대하여 이미지의 ‘픽셀’을 채집했고, 그 색을 그대로 화면에 옮겼다. 물감의 명도를 미세하게 조절하여 수직으로 쌓아 올린 색층들은 배경과 동일한 명도를 유지한다. 이 때문에 단색의 뚜렷한 기하학적 형태들은 화면을 흑백으로 전환하면 배경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다. 기계적인 그라데이션 기법으로 완결된 이 화면은 역설적으로 ‘사이버네틱(Cybernetic)한 비현실 공간’을 창조하며 절제된 조형적 울림을 준다. 함께 출품된 설치 작품 〈마음속의 돌-2026〉은 자연의 순리와 인간의 인위적 의지 사이의 긴장을 시각화한다. 작가는 전남 구례 섬진강 서시천에서 오랜 시간 물에 굴러 다듬어진 화강암 자연석 8개를 수집했다. 한 면은 완벽한 타원형이지만 반대편은 늘 찌그러져 있는 자연의 유한성 앞에서, 작가는 결국 집 주변의 각진 돌을 직접 깎아 자신이 열망하던 완벽한 원형의 돌 1개를 만들어냈다. 자연이 준 8개의 돌과 인간의 노동이 만든 1개의 돌이 나란히 놓인 풍경은 자연 속 생명의 근원과 인간의 존재를 깊이 탐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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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사물과 이미지의 경계에서_이매리, 임선희, 최인아_2026.9.9-10.13

이매리 작가에게 ’시(詩)’는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이지만, 몸과 목소리를 통해 다른 시간과 장소로 옮겨지는 하나의 매개체이다. 작가는 드로잉, 영상, 설치를 넘나들며 전쟁과 이주 등 인류가 반복적으로 겪어 온 사건과 서사의 문제를 다루어 왔다. 작가의 대표 연작 《Poetry Delivery》는 개인의 기억에서 출발해 인간이 오랜 시간 반복해 온 이동과 정착, 떠남과 귀환의 역사를 응시하는 작업이다. 2015년작 《Poetry Delivery 2015》에서는 50개국에서 온 익명의 참여자들이 각자의 언어로 민족시를 낭송하는 2채널 영상을 통해, 문명화와 산업화가 인간과 자연·공동체에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매개로서의 ’시’를 제시했다. 이어 2017년작에서는 작가 자신이 태어난 집터가 고려시대 절터 발굴 현장에 편입되며 사라진 개인사적 경험을 출발점 삼아, 한국 남부의 이주민과 뉴욕의 이주자들의 목소리를 연결했다. 이후 이 연작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자리 The Homeland Yet to Arrive》로 확장되며, 실제 민족시와 자연언어를 24개 음소로 이루어진 가상언어 ’ARU’로 옮기고 여섯 개의 몸을 통해 순환시키는 실험으로 나아갔다. 작가는 언어가 어느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라 듣고 기억하고 다시 건네는 과정 속에서 생성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매리 작가는 이러한 ’시 배달자’로서의 문제의식을 모니터라는 사물-화면 위에 응축된 영상 작업으로 제시한다. 설치가 아닌 화면이라는 매체로 응축된 이번 작업은, 목소리와 기억이라는 비가시적 대상이 이미지로 맺히는 순간을 관객이 화면 앞에서 마주하게 한다.

임선희 작가는 사물을 화면 위의 이미지로 옮기는 회화의 오랜 관습, 즉 정물화로부터 출발해 그 사물과 이미지 사이에 놓인 긴장을 탐구해 왔다. 작가는 2015년부터 평면성, 선, 색, 붓질, 시점, 층위와 같은 회화의 형식적 요소를 중심에 두고 ’미디움으로서의 회화’가 지닌 가능성을 탐구해 왔다. 2017년 이후 서사와 감정, 인간 내면에 관한 질문을 형식적 탐구 위에 결합하기 시작했고, 팬데믹을 지나며 경험한 사회적 고립과 불확실성은 작가의 시선을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과 내면의 모순으로 이끌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Still Life》 연작은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의 형식과 상징을 동시대적 감각으로 재호출한다. 해골과 꺼진 촛불, 시든 꽃으로 죽음과 삶의 덧없음을 이야기했던 과거의 바니타스와 달리, 작가의 화면에는 아름다운 꽃과 과일, 화려한 도자기가 사물로서 등장한다. 단단해 보이는 도자기는 작은 충격에도 깨질 수 있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꽃은 이미 시들어가고 있으며, 풍요를 상징하는 과일은 결국 부패한다 — 작가는 이러한 사물의 속성이 화면 위 이미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완전함과 안정을 붙잡으려는 인간 존재의 일시성을 발견한다. 이 연작의 사유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제기된 ‘무거움과 가벼움’, 그리고 ‘키치(kitsch)’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통상 키치가 가볍고 조악한 모방을 뜻한다면, 쿤데라에게 키치는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제거하고 믿고 싶은 이상적 세계만을 받아들이려는 태도에 가깝다. 임선희 작가는 이 상반된 의미의 키치를 하나의 화면 안에 공존시킴으로써, 완벽하게 편집된 삶을 추구하는 동시대 사회의 이면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회화적 탐구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 대중문화인 ’드라마’의 문제를 다룬 영상 작업이 함께 제시되어, 실제 사물과 미디어가 편집한 이미지 사이의 동시대적 긴장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최인아 작가는 도시에서 마주친 사물과 풍경의 흔적이 화면 위에서 어떻게 이미지로 재구성되는지에 주목한다. 30대 후반의 여성 작가인 그는 근래 한국 현대 회화의 변화와 경향을 보여주는 작가이다. 여러 사회와 국가를 오가며 성장한 작가의 개인사적 경험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작업 세계로 이어졌다. 매번 바뀌는 환경 속에서 관계와 공간이 쉽게 고정되지 않았던 경험은, 작가로 하여금 경험과 상상을 통해 세계를 스스로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태도를 갖게 했다. 변화 사이의 단절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하나의 선형적 서사라기보다 감정과 분위기가 뒤섞인 파편적 서사에 가깝다. 작가는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 화면 위에 남겨진 흔적을 따라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하나의 형상이 드러나면 다른 형상은 지워지거나 겹쳐지고, 색면과 형태는 충돌하고 연결되며 새로운 풍경을 이룬다. 최근 작가는 도시의 주변화된 자연 — 도시의 틈에서 자라나는 식물이나 방치된 강 주변의 녹지 — 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이러한 사물들은 계획된 질서 밖에서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다양한 시간과 흔적을 품고 있다. 작가는 “밤의 강가에서는 민물의 냄새가 더 강하게 난다”고 적으며, 갈대의 수직성과 강의 수평적 흐름이 이루는 대조, 그리고 강 하류의 진흙 속에 묻힌 수많은 시간과 서사에 대한 사유를 화면으로 옮긴다. 현실의 사물과 풍경, 기억, 상상이 색과 면, 형태로 중첩되는 그의 화면은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이미지를 통해, 사물이 하나의 완결된 형상으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실재의 경계에서
1부 이미지와 텍스트의 경계에서_주재환, 김광우_2026.3.25-4.28
2부 언어와 신체의 경계에서_날개, 윤진섭_2026.5.6-6.9
3부 일상과 자연의 경계에서_전원길, 김순임_2026.6.17-7.21
4부 사물과 이미지의 경계에서_이매리, 임선희, 최인아_2026.9.9-10.13


*본 전시는 202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지원사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파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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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영 개인전
파와찰
2025.12.3-12.15
mon-fri 11:00-17:00


파 破
와 渦
찰 擦


파 破:깨트릴 파
시작은 뭉개진 시야의 찢어짐, 파열이다. 그러한 파열을 인식하면 곧 세계는 무수히 들이치는 것들의 잔상과 궤적으로 가득 찬다. 그 첨예한 전류선들은 어떠한 전조를 따라 고이고 응축된다. 폭발하고 잔류하며, 다시 시작된다. 그러한 형세, 미세한 진동이 거칠데 추동하는 힘이 되어가는 감각에 집중하며 마침내 폭풍전야와 같이 고조되는 긴장과 고요함의 순간에 닿고자 한다.


와 渦:소용돌이 와
파破로부터 일어난 소용돌이는 공명을 통해 머나먼 물결이 되어간다. 그 궤적의 한 자락이 또 다른 자락과 맞물리며, 그 틈새로부터 자아진 새로운 파동은 또다시 나아가기를 계속한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미세한 공기의 균열, 한 순간의 틈새로부터 바람짓은 일어난다. 지표면을 타고 흐르는 바람과 땅 아래의 맥동은 공명한다. 지형의 굴곡을 거치며 줄기는 몸집을 불리고 폭류가 되어 휘몰아친다. 이윽고 다시 잔류로서 남아 골짜기의 틈새에서 새롭게 폭풍의 씨앗이 된다.


찰 擦:문지를 찰
소용돌이는 폭발과 응축의 전개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소용돌이 속에는 무수한 결들이 서로 달라붙고 반발하며 팽팽한 긴장 속에 있다. 그 힘의 균형을 깨고 어느 가능성으로 열어젖히는가에 따라 방향은 결정된다. 형태는 분절되거나 연속된다.
어떠한 힘이 전개되고 나아가게끔 추동시키는 것은 균형의 깨어짐-찰擦의 순간들이다.


힘은 곧추 나아가려 하고 강하게 부딪혀온다. 그러한 과정에서 장애물과 일으키게 되는 파찰의 과정, 즉 굽어짐과 접힘, 빨려들어가거나 꿰뚫어 나감, 강하게 반발하거나 탄력을 잃고 풀어짐을 판화 베이스의 설치 작업으로 표현한다. 이를 위해 프레스기로 판화를 찍는 과정에서 생기는 우연한 오류들-강한 압력에 의한 튕김과 상처, 접히거나 찢어진 종이, 터진 잉크 자국, 베어나오는 물감 등을 활용한다.


힘은 파찰을 통해 새로운 기형으로 뻗어나간다. 프레스기가 압력을 가할 때 지지체의 굴곡이 주는 공백과 둔턱은 일정하게 작용하던 힘의 방향, 크기에 대한 저항 요소로 작동한다. 유연한 볼륨은 짓눌려 단단해지고 단단한 표면은 수축에 의해 찢어진다. 이로 인해 이미지에 새로이 공백과 자국이 남는다. 이 우연한 분절들로 각 마디는 새로운 시퀀스로 거듭난다. [작가노트]


※이 전시는 경기문화재단의 2025 경기예술지원 2차 <생애 첫 지원 시각예술 분야>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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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영 유승호
빽
2025.10.22-11.25
mon-fri 11:00-17:00


김창영, 유승호 작가의 2인전 <빽>은 밑작업을 뜻하는 백칠(back漆)에서 연유되었습니다. 빽(백)이라는 단어는 뒤, 뒤쪽이라는 의미의 back 외에도 흰 백(白), 숫자 백(百), bag, 말하는 사람 뒤에 붙는 ㅇㅇ백, 배경 혹은 뒤를 봐주는 사람을 뜻하는 빽(background), 뷁, 빽빽하다, 빽빽거리다 등 한글, 영어, 한자가 뒤섞여 다양한 형태의 음과 뜻을 갖는 복합적인 단어입니다. <빽>전은 김창영, 유승호 작가가 백칠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우연히 시작되었습니다. 유승호 작가는 90년대 후반 실험적으로 백칠에 몰두했던 시기가 있었고 김창영 작가의 작업에서 백칠은 작업의 시작과 맺음을 결정하는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김창영 작가는 최소한의 색과 형태를 사용하여 자연과 인공, 빛과 어둠, 직선과 곡선 등 이분법적으로 대립하는 개념들을 추상적인 방식으로 그리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신작 [Ghost] 시리즈는 달의 위상을 여름과 가을로 나누어 작업한 12점의 연작입니다. 매일 모습이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달도 실상은 늘 한곁같음과 마찬가지로 세월의 풍파에도 늘 곁(background)을 지키는 가족을 향한 고마움과 애틋함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김창영 작가는 백칠을 한 캔버스를 곱게 갈아내어 도자의 표면과 같이 결을 매끈하게 만든 다음, 한 방향으로 내려긋는 반복적인 붓칠을 통해 색이 캔버스에 서서히 스며들도록 합니다. 색과 형태가 캔버스에 자연스럽게 스며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자연의 이치와 순리에 거스르지 않듯이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 작가의 순응적 태도와 닮아 있습니다.


문자산수화로 동양화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유승호 작가는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해체하고 무의식에 가까운 작가의 행위를 드러내는 벽(back)드로잉 신작을 선보입니다. 그의 기존 작업이 문자에서 이미지(산수화)로 이동하는 선형적 과정이었다면 최근의 작업은 문자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문자 혹은 문자로 명명할 수 없는 무언가로 옮겨다니며 비선형적, 비연속적 이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작가가 문자와 이미지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기존 작업에 대한 해석이나 판단으로부터 한층 자유로워진 상태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번 전시는 백칠에서 파생된 ‘빽’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들여다보고 회화(평면)의 고유성과 유연성이 유희적으로 만나는 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글_김현 큐레이터


1. 김창영, Ghost autumn01-06, oil on canvas, 182×60cm, 2025
2. 유승호, 빽, 286×563cm, 여러 재료, 2025

Neo Icon: Game M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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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이콘: 게임 모드
NEO ICON: GAME MODE
조현익 개인전
2025.9.3-9.30
아트스페이스 휴
경기도 파주시 산남로 37-9


예술과 삶의 간극과 종교와 현실의 충돌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예술과 예술가의 삶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종교적 신념과 현실의 염원 역시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공존한다. 예술과 예술가의 삶이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는 경우 우리는 진정성을 이야기하고 종교적 신념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경우 우리는 성인(聖人)을 이야기한다.


조현익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는 단연 성스러움일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성스러움은 일상으로부터 예술을, 현실로부터 종교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2005년 개인전 [플래시]부터 2025년 [네오 이콘]까지 20년간 조현익 작가가 그린 그림의 대상은 늘 그의 주변 가까이에 있었다. 가장 비종교적인 대상의 평범한 일상이 성화의 숭고한 성스러움을 대신하는 키치적 즐거움을 우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조현익 작가는 2015년 무렵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면서 본격적으로 일상의 순간을 작업으로 길어 올리기 시작했다. 100일된 아이의 모습은 아기 석가모니의 결연함으로(믿음의 도리-탄생 II, 2016),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믿음의 도리-탄생, 2017)은 피에타의 숭고함으로 치환되었다. 블록과 카봇의 형상으로 만든 탑(다봇탑, 2018)과 아이들의 약병 사진(약사여래불곰, 2020)을 거쳐 <조형연구>와 <네오 이콘: 만찬>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업은 자녀들의 성장의 흔적을 남긴 기록화이자 일상을 숭고함으로 끌어올린 일종의 종교화로 기능한다.


이번 전시 [네오 이콘: 게임 모드]는 2024년 이후 조현익 작가가 실행하고 있는 [네오 이콘] 시리즈의 새작업이다. 이전 작업에서는 철이나 금(벽지)를 사용하여 현실과 대비되는 배경을 설정하여 종교화의 과장됨을 연출하였다면 [Neo Icon: 가족사진-빅겜고수와 암흑물질 소총], [Neo Icon: 가족사진-빅겜고수와 친구들]은 아이들이 즐겨하는 로블록스 게임 속 화면을 그대로 배경으로 재현하였다. 아이들의 손에는 저마다 화려한 총이 들려있는데 이는 게임에서 사용되는 총을 아이들이 종이로 직접 만든 것으로 현실과 가상을 절묘하게 교차시키고 있다.


“두 아이와 함께한 아파트 거실 속의 생활이 자연스런 삶의 터전이 되어 버린 지 오래 전 일이고, 그 소우주 안에서 하루에도 생각보다 많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수많은 장난감 더미에서 회화성과 조형성을 발견해내기도 하고, 갓 말을 하기 시작한 아이들의 언어에 신비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유아용 약병의 기이한 마스코트에서 종교성을 감지하기도 하며, 한 번도 실체를 볼 수 없는 변신 로봇과 원시 시대의 공룡은 어린이용 TV와 장난감에 수도 없이 부활한다.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 마음으로, 관찰자이자 발견자가 된 것처럼 삶에 관한 의미를 되새겨 본다.” (작가노트)


조현익 작가는 사적인 경험인 결혼, 출산, 육아의 과정에서 체득한 경험을 기반으로 삶과 예술, 일상과 작업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삶과 일상을 그대로 작업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성화의 방식을 필연적으로 채택했다. 그 필연성은 출산과 육아의 경험으로부터 알게 된 부모의 희생이라는 보편적 가치에서 종교적 숭고함을 발견한 것과 관계한다. 대체로 예술에 있어 숭고미는 초월적 대상으로부터 부여되는 것이었으나 조현익 작가의 작업은 숭고의 대상을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옮겨 놓음으로서 숭고의 미학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글_김현 큐레이터


1. 우리집 무기고-아들의 무기들, 색상지, 골판지, 테이프, 색연필, 마커, 수성페인트, 금속 다보, 나무패널, 165×290cm, 2025
2. 유니콘 총이 있는 우리집 무기고-딸의 무기들, 색상지, 골판지, 테이프, 색연필, 마커, 시트지, 나무패널, 91×117cm, 2025
3. Neo Icon: 가족사진-빅겜고수와 친구들, 캔버스에 아크릴, 193.9×253.1cm, 2024
4. Neo Icon: 가족사진-빅겜고수와 암흑물질 소총, 캔버스에 아크릴, 193.9×253.1cm, 2024-2025


※이 전시는 2025년 경기창작캠퍼스×문화예술기관 창작발표 지원사업 「그대만 있다면」에 선정된 사업입니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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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기에도
양경렬 개인전
2025.5.30-6.26
아트스페이스 휴
경기도 파주시 산남로 37-9


작업실 창으로 새어 들어온 빛이 캔버스에 내려앉는 중이었다. 창밖은 온통 초록으로 만연한데 그의 작업실은 느닷없이 차분하고 서늘했다. 작업실의 높은 천고 끄트머리에 있는 창문마저 불투명한 무엇으로 가려져 빛은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캔버스 끝에서 주춤하던 빛은 우리가 몇 개의 작품을 지나는 사이 곧고 환하게 캔버스에 내려앉았다.


“작업실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빛은 아침과 오후, 맑은 날과 흐린 날, 빛은 매번 다르게 스며들고, 그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와 내 감정의 결도 달라진다. 그 빛을 통해 나는 시간의 흐름, 기억의 조각, 그리고 덧없음과 같은 감정의 순간들을 붙잡고자 했다. 빛은 나에게 단순한 시각적 요소를 넘어, 정서적 리듬과 감각적 서사를 형성하는 요소이다.”


양경렬 작가는 3년 전 무렵부터 사생을 시작했다. 작업실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앞으로는 반짝이는 강이 늘 그의 주변에 있었으니까. 그림을 그리지 않기에는 너무 아까운 계절이었으니까. 사생은 몹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작은 나무들, 얕은 개울과 풀과 돌들을 담담하게 그린 작업을 보고 있으니 그가 이전 작업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간절하게 덜어내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양경렬 작가의 이전 작업은 차분한 그의 작업실처럼 신중한 그의 말투처럼 이성적이고 치밀한 것이었다. 그의 작업에는 늘 인물이 있었다. 인물이 없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인물(군중)이 모이는 장소가 암묵적으로 이를 표의하고 있었다. 인물은 그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자 현재를 기록하는 행위로 화면에 새겨졌다. 그리고 이는 빛의 강한 대비와 화면을 분할하는 대립적 구도로 명확하고 강인하게 각인되고는 했다.


2023년 개인전 [정물: 경계의 제스처]을 계기로 양경렬 작가는 자연과 빛으로 인물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의 주요한 소재였던 광장은 산과 강으로, 모뉴먼트는 빛으로 치환되었다. 한 화면에 시공간이 교차하며 대립적 구도를 유지하던 그의 작업은 사생을 거쳐 비로소 상하, 좌우의 구분을 지우고 자연의 겸허함을 묵묵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연의 풍경이나 주변의 사물, 작업실 안의 고요한 공기마저도 나에게는 감정의 매개체가 되고 ‘감정’ 정물을 통해 사생을 이어가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 너머에 숨어 있는 감정의 파편을 발견하고 그것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나의 사생은 관찰을 넘어 감정의 층위와 움직임을 기록하는 심리적 행위에 가깝다.”


베르그송은 과정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 연속적인 의식의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의 본성을 지속(durée)으로 보았다. 양경렬의 이전 작업을 과거의 특정한 시대나 장소를 현재와 충돌시켜 대립이나 갈등을 일으키는 정지된 상태의 사건으로 본다면 그의 최근 작업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직관과 사유 행위를 반복하는 지속의 행위로 볼 수 있다. 결국 그의 사생 작업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행위가 아니라 작가가 오랜 시간 지속해온 시간과 장소에 대한 개념이 인식과 의식의 반복적인 성찰을 거듭하며 새로운 층위로 나아가는 필연적 과정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글_김현 큐레이터


1. 옥천면 양천리 304_1, oil on linen, 100×63cm, 2023-5
2. 옥천면 양천리 304_1, oil on linen, 162×130cm, 2025

답장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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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길 바래요


<답장부탁드립니다>는 정철규 작가가 2020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이름을 지우고 모이는 자리> 연작의 새 작업들이다. 각자의 이름을 지우고 나눈 어렴풋한 이야기들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작가는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반짝이는 색실로 수를 놓기 시작했다. 흩어진 이야기들은 눈물 자국이 되고, 글이 되고, 별이 되고, 빈 편지지가 되어 한 구절의 이름 하나씩을 갖게 되었다. 2020년 OCI미술관에서 전시한 정철규 작가의 44개의 실드로잉 작업 <이름을 지우고 모이는 자리>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망각에 부치는 노래>(2004)의 정서를 은은하게 환기시켰다. <망각에 부치는 노래>는 루이즈 부르주아가 자신이 입었던 옷을 조각내고 다시 이어 붙여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함축한 작품이다. 정철규 작가는 누군가의 이름으로 감춰진 남성 소수자들의 44개의 이야기를 짙은 양복천에 수놓았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해 얇아진 종이처럼 희미하게 남아있거나 서서히 지워져가는 이야기들은 어두운 천위에서 오래도록 반짝이게 되었다.


양복점에서 옷을 지어주는 재단사처럼
바느질(needlework)은 물질적 형태를 갖는 권위적인 작업 방식을 대신하여 다양성을 수용하는 포용력과 유연함으로 많은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 작가들에게 선호되어 왔다. 다양한 천 조각들을 이어 붙여 하나로 연결하는 패치워크 작업이나 루이즈 부르주아의 자아치유적 도구로서의 바느질, 모든 것을 감싸고 수용하는 김수자의 보따리가 그러하듯 말이다. 정철규 작가는 양복점에서 옷을 지어주는 재단사처럼 각각의 이야기가 불러들이는 이미지를 바느질이라는 여성적 상징물을 통해 시각화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작가가 선택한 짙은 감색의 양복천은 가부장의 권위와 사회적 관념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어떠한 작업 방식보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이에 대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작가는 이후에도 <브라더 양복점>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마음 맞춤 재단사’를 자처하며 사회적으로 호명되지 못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수집하고 작업으로 지어나갔다. 5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게 되었을까. <답장부탁드립니다>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손바닥 위에 잠시 앉았다 사라지는 11월의 첫눈 같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백 여덟 번째 이별 편지에 대한 답장
전시는 17년간의 11월 달력을 수놓은 <59일을 기억하기 위한 장치_그날이 다시 돌아와도 그날은 그날이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로 시작된다. 2008년부터 2024년까지의 11월 달력을 연결하여 설치한 작업인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점은 이전의 양복천의 색과는 대치되는 분홍색 계열의 천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복천의 어둡고 차분한 느낌과는 다르게 17점의 색감과 질감이 모두 달라 짐짓 밝고 경쾌한 한복천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전 회화 작업에서 수용과 거부를 동시에 나타내는 이중적 장치로 분홍색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양복천 작업 이후 이와 같은 소재적 변화는 다수의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서사에서 비롯된 정서와 심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2024년부터 2008년까지 시간을 거꾸로 따라가다 보면 바닥에 놓여있는 설치 작업 <백 여덟 번째 이별 편지에 대한 답장1〉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프랑스관 작가인 소피 칼의 <잘 지내길 바래요>에 대한 108번째 답장이다. 소피 칼은 자신이 받은 이별 편지를 107명의 지인에게 보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해달라고 부탁했고 다양한 형태로 돌아온 107개의 답장과 지인의 사진을 함께 전시했다. 정철규 작가는 2미터 남짓한 흰 천에 옅은 색연필로 편지의 내용을 적고 이를 여러 조각으로 자른 다음 다시 실로 꿰매었다. 찢어진 상처를 드러내며 누워있는 편지의 모습은 온기가 빠져나간 이불처럼 상실의 흔적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 장의 천이 나란하게 걸려있는 <서성거리는 노크>는 2023년 갤러리2에서의 개인전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에 전시한 <닮아가는 벽>을 떠올리게 한다. 낡고 오래된 셔터에 앙상한 나무 그림자가 비친 모습을 옅은 색연필로 그린 작업인데 마치 창문 너머로 보는 풍경처럼 가까이에 있지만 무언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듯 서늘한 공허함이 감돈다. <닮아가는 벽>은 창을 그리워하지만 가까이 갈 수 없고 <서성거리는 노크>의 차가운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정철규 작가는 <답장부탁드립니다>가 관계의 실패담을 고백하는 누군가의 방과 같은 전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말은 그의 지난 작업이 그래왔듯이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공감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면서 누군가의 마음이 작동되기를 바라고 그 마음이 작업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열어보는 편지 봉투 안에는 두 장의 편지지가 담겨있다. 한 장은 그때의 나에게 다른 한 장은 그때의 당신에게 마음으로 편지를 써본다. 잘 지내길 바란다고.


글_김현 큐레이터
촬영_스튜디오 독립


1. 백 여덟 번째 이별 편지에 대한 답장1, 옥스퍼드 원단위에 색연필 드로잉, 손바느질 실드로잉, 202×153cm, 2024
2. 59일을 기억하기 위한 장치_그날이 다시 돌아와도 그날은 그날이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65×50cm(17pcs), 옷 원단위에 손바느질 실드로잉, 2024
3. 서성거리는 노크, 310×121cm(2pcs), 옥스퍼드 원단위에 색연필 드로잉, 2024

답장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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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규 개인전
답장부탁드립니다
2024.11.20-12.24


정철규 작가의 개인전 《답장부탁드립니다》는 관계의 실패담을 고백하는 누군가의 방을 펼쳐 놓은 것 같다. 벽에는 17년간의 11월 달력을 수놓은 손바느질 실드로잉 작품 17점이 나란히 걸려있고, 바닥에는 누군가에게 이별을 고하는 내용이 적힌 편지를 색연필 드로잉으로 제작한 설치 작품이 뉘어져 있다. 작가는 이 전시가 누군가의 일기장을 몰래 읽어 내려가는 듯한 기분으로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한다.


정철규 작가는 2020년부터 사회적 약자로 불리는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름을 지우고 모이는 자리〉(2020~)는 인터뷰이가 지인의 이야기를 전하는 ‘전달인터뷰’ 방식으로 실제(혹은 허구의) 남성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남성성을 상징하는 양복 원단위에 반짝이는 색실을 사용해 작가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수놓은 설치 작품으로 구현된다. 이 프로젝트는 《브라더 양복점》(2021~), 〈짝사랑 실험실〉(2022), 《구름이 되었다가, 진주가 되었다가,》(2023) 전시와 작품으로 이어지고 이번 아트스페이스 휴에서의 개인전 《답장부탁드립니다》로 연결된다.


설치 작품 〈백 여덟 번째 이별 편지에 대한 답장1〉은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프랑스관에서 전시한 소피 칼의 〈잘 지내길 바래요〉 작품에서 착안해 제작한 작품이다. 소피 칼은 그의 남자친구에게 갑작스러운 이별 편지를 받았고 이 편지를 107명의 각계각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편지를 해석하여 표현해 주기를 부탁했다. 이에 정철규 작가는 소피 칼이 이 이별 편지를 108번째로 보낸 사람으로 설정해 이별 편지를 표현했다. 곱씹고, 찢고, 다시 꿰매는 과정으로 제작한 편지는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을 시적으로 보여주며 추후 소피 칼에게 메일로 보낼 예정이다.


그 외에도 〈지금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와 〈서성거리는 노크〉등 천위에 수를 놓은 손바느질 실드로잉 작품이나 천위에 색연필로 옅게 드로잉하는 방식으로 정철규 작가는 사랑이라는 단어로 통용되는 수많은 관계의 생겨남과 사라짐의 쓸쓸한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하기를 시도한다. 정철규 작가는 단국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또한 2018년 경기창작센터 입주를 시작으로 OCI미술관, 팔복예술공장,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을 거쳐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소리를 보여주마 3부_양아치, 오재우, 이학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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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보여주마 3부
2024.10.25-11.14
양아치, 오재우, 이학승
2024.10.25(금) 18:00
퍼포먼스_Kayip+이강일


1. 양아치 <서울 좀비> 사운드 및 설치, 10분 30초, 2024
칠흑 같은 밤, 서울 좀비가 있다.
칠흑 같은 영화, 서울 좀비가 있다.
양아치 작가의 신작 <서울 좀비>는 제목과 크레딧을 제외하고 일체의 시각적인 요소들을 제거한 영상, 사운드 작업으로 오로지 소리만으로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일종의 실험 영화이다.


2. 오재우 <음소거 된 비명> 싱글채널 비디오, 16분, 2024
너의 주님께서 천사들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땅 위에 대리자를 세울것이다’ 라고 하셨다. 천사들은 “그곳에서 혼란을 잃으키고, 피를 흘리는 자를 세우려 하시나이까? 저희는 찬양과 거룩함으로 당신을 경배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말씀 하시길,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노라.” 라고 하셨다. (바까라 30절)
오재우 작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하마스) 전쟁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폭로한다. 팔레스타인 지인을 통해 현재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을 마주하게 된 작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예술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이를 직면하기로 한다. 아버지를 추모하는 노래를 부르는 아이의 구슬픈 목소리와 코란의 한 구절을 구송하는 팔레스타인인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잔혹한 현실과 오버랩되며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음소거된 비명>의 실상을 고발한다.


3. 이학승 <듣기평가> 사운드 및 설치, 23분, 2024
‘이들 중 누가, 이 사회에서, 정상 범주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학승 작가의 <듣기 평가>는 청력이 서로 다른 3명의 참가자가 듣기 평가에 참가하는 내용의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사운드 작업이다. 3명의 참가자는 같은 소리를 듣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참가들의 청력보다는 서로 다른 경험과 정서가 소리를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소리의 역할과 기능을 연구하고 예술과 비예술,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대해 질문한다.


4. Kayip+이강일, WGWG ㅇㄱㅇㄱ, 오디오 비디오 퍼포먼스, 25분, 2024
WGWG ㅇㄱㅇㄱ는 사회적 담론의 교차점을 청각적·시각적 풍경으로 재구성한 메타적 사고 실험이다. 서로 다른 정치 성향을 지닌 5명의 AI 토론자들은 각자의 성향을 반영해 AI가 선정한 주제를 두고 토론을 벌이며, 그들의 발언은 실시간으로 파라미터화되어 음향적 패턴을 형성한다. 두 명의 인간 퍼포머는 이 소리의 흐름에 개입해 함께 질감을 조율하고, 이를 통해 AI의 발언은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동시에 소리로 변환되어 병치된다. 정치적 대립과 대화의 소음이 상호작용하는 순간들은 해체되며 예측할 수 없는 질서를 만들어내며 끝없는 의견 교환 속에서 점차 흐려지는 방향성을 통해, 정보의 과잉과 소통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현대적 소통의 역설을 은유한다.


*본 사업은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4년 시각예술창작산실에 선정된 사업입니다.

소리를 보여주마 2부_김준, 민성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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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보여주마 2부
2024.9.27-10.17
김준, 민성홍
2024.9.27(금) 18:00
퍼포먼스_콜렉티브 푸실


1. 김준 <마지막 시간, 다시 찾은 공간> 목재, 종이, 스피커, 앰프, 다채널 사운드, 가변설치, 2024
김준 작가는 특정한 장소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채집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소리 환경을 만든다. <마지막 시간, 다시 찾은 공간>은 나무 기둥 형태의 스피커에서 자연의 소리와 그에 화답하는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는 사운드 설치 작품이다. 작가는 강원도 평창에 있는 자택에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자연의 소리와 이에 응답한 피아노 연주를 담았다. 파주의 자연 풍경에 평창의 소리가 전해지며 소리에 담긴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불러들인다.


2. 민성홍 <난청지역:안테나 새> 나무 팔레트, 바퀴, 안테나, 세라믹, 라디오, 가변설치, 2024
민성홍 작가는 수집한 오브제를 변형하여 신체적 형태를 부여한 근작에 크리스탈 라디오를 결합한 <순환하는 신체_안테나 새>를 선보인다. 크리스탈 라디오는 게르마늄 라디오 또는 광석 라디오로 불리며 주변에 떠돌아다니는 전파를 소리로 변환하는 장치이다. 민성홍 작가는 그간 개인과 집단, 사회의 관계망 안에서 발생하는 보이지 않는 힘과 욕망의 생성과 변형, 이동을 다루는 작업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신작은 보이지 않는 신호는 송수신하는 안테나라는 오브제를 사용하여 작가가 그동안 견지한 작업 개념을 소리로 연결한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다.


3. 콜렉티브 푸실(양혜리, 이경민, 임지연, 한수지), One Clear Day
9월 27일(금) 오후 6시에는 콜렉티브 푸실(양혜리, 이경민, 임지연, 한수지)의 사운드 퍼포먼스 One Clear Day 공연이 펼쳐진다. One Clear Day는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과 글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소리와 시각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퍼포먼스이다. 음악, 설치, 퍼포먼스, 아티스트북이 결합된 형태로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변화시키고 관객이 작품에 감응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3부는 10월 25일부터 11월 14일까지 양아치, 오재우, 이학승 작가가 참여하며 10월 25일(금) 카입+이강일 작가의 사운드 퍼포먼스 공연이 펼쳐질 예정이다.


*본 사업은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4년 시각예술창작산실에 선정된 사업입니다.

소리를 보여주마 1부 퍼포먼스_이상현, 성능경, 윤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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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보여주마 1부
2024.8.23-9.12
김구림, 박이소, 백남준, 이상현
2024.8.28(수) 18:00
퍼포먼스_이상현, 성능경, 윤진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