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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MMALATTAM

BITNALEE 개인전

 

2020.9.25-10.8
- 10:00-18:00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111, 301
031-955-1595

소설가 김동인의 소설집 ‘감자’에서 작가는 여주인공의 생애와 내면을 마치 인형처럼 조종할 수 있다고 하여 전지적 작가시점을‘인형 조종술’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는 소설에서 쓰이는 일종의 창작방법론인데, 본인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을 인형화 하여 조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하다는 측면이 있다.  인형의 모습을 빌려 인물을 박제시키는 작업은 인물을 일종의 피규어(물건)처럼 만들어 일시적으로 소유욕을 충족시킨다. 헌팅 트로피(hunting trophy)는 사냥의 결과물로서 일종의 전리품(戰利品)의 역할을 하는데, 작가에게 인형 머리와 같은 토르소(torso) 조각들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으로 치환된다. BITNA LEE 작업노트 중

*봄말라탐: 인도 동남부의 타밀나두주 지역에서 공연되는 마리오네트 유형의 복잡하고 연극적인 인형극을 뜻함.

불편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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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손
김창영 박광선 윤상윤


2020.9.25-10.8
- 10:00-18:00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111, 301
031-955-1595


이번 전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예비전속작가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김창영, 박광선, 윤상윤 작가의 기획전이다. ‘예비 전속작가제 지원’은 전업 미술 작가들이 창작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한편 전속작가를 운영하기 어려운 중소 화랑 및 비영리전시공간에 작가를 발굴할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김창영의 작업은 캔버스의 밑바탕을 칠하는 백칠로부터 시작된다. 백칠은 본래 물감의 발색을 좋게 하기 위한 과정이나, 김창영의 작업에서는 그 작용이 반대로 적용된다. 백칠이 마르면 그라인더를 이용해서 화면 전체를 곱게 간다. 그리고 다시 백칠을 하고 말리고 그라인더로 가는 작업을 수차례 반복한다. 이 지난한 과정을 지나면 캔버스의 표면은 백자나 실크의 그것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워지는데 이때 작가는 비로소 색을 올리기 시작한다. 대도시 빌딩숲의 곧은 직선과 작가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낮고 부드러운 산과 강의 곡선이 만난다. 작가의 기억 속 상이한 시간과 공간의 경험이 한 화면에서 충돌한다. 어떠한 내러티브도 유추할 수 없는 오직 색채뿐인 화면 안에서 그의 멀어짐과 가까움, 짙고 옅음, 선들의 운동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마주한 풍경과 심상에 도달하게 된다.
박광선은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들 때 사용되는 합판을 다룬다. 주재료가 아닌 보조 재료로서 필요에 의해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합판은 매끄러운 캔버스 대신 작가의 굴곡진 경험과 정서를 담아내기에 합당한 재료였다. 합판 주변을 손으로 힘겹게 잡아떼어 투박한 질감을 그대로 노출하는데 거리를 두고 보면 마치 고의적으로 화면을 벗어난 능숙한 화가의 거친 붓칠처럼 보인다. 부드러운 붓 끝이 아닌 작가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매혹적인 마티에르다. 합판은 캔버스와는 다르게 물감의 색을 흡수하고 합판 자체가 갖는 나무색으로 인해 마치 빛바랜 오랜 느낌을 준다. 작가는 주변 지인의 초상을 합판에 그리거나, 지인이 직접 사용했던 사물-거울-과 콜라주하여 개인의 경험과 역사를 기억하고 애도한다. 작가는 주변 지인의 죽음을 계기로 관계의 생성과 소멸, 생명의 순환과 자연 순응적인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윤상윤은 이드(id)-자아-초자아로 화면을 구분하는 오른손 회화에서 벗어나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그린 드로잉을 선보인다. 작가는 기존에 화면을 3단으로 분리하여 개인의 성격을 구분하는 요소를 분석하거나 개인과 집단 혹은 집단 이기심 등을 다루는데, 왼손 드로잉은 작가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관심사들을 자연스럽게 화면으로 불러온다. 왼손 드로잉은 단순히 기술이나 기법상의 미숙함뿐만 아니라 작가의 무의식을 자극하여 비이성, 비논리적 사유와 방식들이 자유롭게 작동하도록 한다.


 


 


 

V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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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SE

김 준 개인전


2020.9.14-9.23

- 10:00-18:00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111, 301
031-955-1595


몸속의 몸, 이것은 신체가 아니다.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

   

1

목과 팔과 다리가 절단된 토르소는 기괴하다. 양팔이 없는 비너스의 아름다움도 본래 변태적이다. 인도의 한 지역에서는 돌연변이와 같은 변형된 신체가 신(神)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손이나 얼굴이 여럿인 신의 모습처럼. 20세기 초 큐비스트들도 인체를 이리저리 자르고 옮겨 붙이며 표현했다. 수많은 B급영화들 속의 미친 의사들이 신체 절단과 신체 접합의 기괴한 방법으로 살아있는 시체들을 창조했다. 식물과 동물과 무기물이 신체와 유기적으로 합성된다. 어떤 일본만화는 미친 범죄자가 사람의 뇌에 꽃을 심기도 한다. 메트릭스 속 인간은 일종의 에너지를 만드는 발전기 또는 배터리다. 우주 또는 미래의 암울한 세계에서는 인간의 신체가 다양하게 사유되고 사용된다. 머나먼 우주의 어느 세계에서는 인간이 꽃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꽃이 인간에게 물을 주며 키울지도 모른다.

현대의 성형수술도 이러한 신체변형의 살아있는 예이다. 본래의 몸을 인위적으로 깎고 다듬고 붙이며 조작한다. 신체변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한 관습적 인식과 가상을 해체한다. 몸이 몸이 아닌 것이 된다.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던 인간 또는 몸이란 한편의 신화일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비유되었다. 정신적인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인간의 몸은 과소평가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정신과 영혼을 위해 인간의 몸은 물질이 되고 그릇이 되어야 했다. 영적 가치를 담는 그릇으로서 인간의 몸은 성배(聖杯)일 수도 있지만 신의 아들에게나 해당하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몸은 한편으로는 시커먼 무저갱(無底坑)을 향해 추락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으로 한없이 상승하는 사건의 장소이다. 그릇이 된 몸은 비극적이다.

작품은 신체 안의 신체가 동물처럼 또는 식물처럼 증식하는 것을 보여준다. 음울하지만 동시에 화려한 조형과 칼라의 귀족적 취향과 어둡고 괴이한 그로테스크함이 복잡하지 않게 결합한다. 단지 이미지일 뿐이지만 김준 작가의 손으로 만들어낸 신체는 인간의 몸을 닮은 어떤 존재일 뿐이다. 인간을 닮았지만 이성이나 오성, 감정이 빠져있는 사물. 예술을 꽃에 비유한다면 조화가 아닌 이상 꽃은 곧 시들고 죽어버린다. 빨리 시들고 빨리 죽어버릴수록 그것이 진짜 예술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울 수도 있다. 인간의 몸이 빠른 노화와 죽음으로 인해 생동하는 몸은 중요한 사건이 된다. 사건은 한 순간 존재했다 사라지니 말이다. 수천년 수만년의 시간 속에서 인간, 인류는 지구에서 벌어졌던 무수한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는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가설이자 몽상이다. 우리는 하나의 사건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다. 인간의 신체는 사건의 장소가 되고 사물이 되거나 사물의 일부가 된다.

야만의 시대에 기근이 들거나 전쟁이 벌어지면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을 분류하고 사육하고 잡아먹는 시대는 야만의 시대이다. 몸속의 몸은 몸이 몸을 잡아먹고 있는 약육강식을 은유할지도 모른다. 또는 역사 속 인류의 몸을 저 멀리 기존의 도덕과 윤리가 뒤틀리고 완전히 다른 세계와 차원으로 던져버리는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2

이번 전시는 20여년 이상 지속해온 김준 작가의 문신시리즈가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문신과 신체를 넘어서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맥락, 자본주의 세계의 신체 등을 은유하던 작업에서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존재론적 차원에 작가의 몽상이 접촉하고 있다는 징후를 읽을 수 있다.

문신이라는 오래되고 원형적인 문화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시절 야만의 치부되어 사멸할 뻔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탈구조주의와 다원주의의 등장으로 신체와 관련된 오래되고 고유한 수많은 지역은 문화가 복권되었다. 성리학적 몸의 인식이 지배적인 한국에서는 2000년대 김준 작가를 비롯한 미술가들에 의해 몸의 새로운 이해가 현대미술의 중요한 주제이자 형식으로 소개되었다. 문신은 곧 사멸해버릴 인간의 몸에 영원성을 새기는 것이다. 문신은 의지를 굳게 하고 결기를 세우는 장치이기도 하다. 날카로운 바늘에 염료를 묻혀 인간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한땀 한땀 새기는 문신은 살아있는 피부의 일부를 죽임으로써 형상을 갖게 된다. 문신이란 곧 생명과 죽음의 상관성을 은유한다. 생명의 찬란함이 죽음에 무게를 더해주고 깊고 어두운 죽음이 살아있음을 돋보이게 한다.

김준 작가의 몽상 속에서 사람의 몸은 꽃병이 되고 정물이 된다. 도자기 또는 대리석으로 만든 인체의 절단된 면 사이로 사물들이 담겨 있다. 몸에 몸을 심고 몸을 꽃처럼 피웠다. 작가에게 인간의 신체는 살아 숨쉬는 신체가 아니라 무한히 변화하는 과정의 한 단계에 머물고 있는 사물일 뿐이다.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의 차별이 없다. 생사(生死)가 등가교환을 할 수 있는 세계의 이미지이다. 인간의 몸이 더 높은 차원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면 동일한 차원의 또 다른 몸을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몸을 담고 있는 몸의 형상은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질문한다.

우리 내면의 심리를 은유하는 그로테스크하며 표현적인 신체 이미지는 매력적이다. 이미지는 초현실적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는 인간의 몸이 그릇이나 병이 될 수도 있다. 꿈속에서 기이하게 또는 강박적으로 변형된 몸이 역설적으로 현실의 몸을 리얼하게 재현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몸의 몽상. 몸의 수수께끼. 해체되고 재조립된 괴이한 신체들. 이미지는 사람의 몸도 그릇도 아니다. 우리에게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이미지일 뿐이다. 김준 작가의 대표적인 이미지들은 몸을 터부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대단히 예외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휴관안내

임시공휴일인 8 17() 휴관합니다.

뽈뽈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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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뽈뽈

강주형 김윤섭 이승훈


2020.8.14-9.10

- 10:00-18:00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111, 301
031-955-1595

 


정확한 방향이나 일정한 패턴을 그리지 않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인 뽈뽈뽈은 드로잉과 회화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만드는 작가들의 작업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단어이다. 이들의 작업을 구태여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을 구성하는 이야기 중심의 서사성, 실재를 재현하려는 정교한 기술력과는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그림은 철저하게 하나의 회화이자 오브제로서 모니터라는 프레임 안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며 존재감을 갖는다. 강주형과 이승훈은 ‘시간-회화’라고 부르는 새로운 형식의 협업 작업을 통해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3분가량의 짧은 애니메이션 <물레>는 작가가 거주하는 서울 문래동 일대에서 마주한 일상적인 풍경과 인물을 스케치한 작업으로 상이한 시공간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작동시켜 예기치 못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김윤섭은 회화의 형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는 과정에서 최근 회화와 드로잉, 애니메이션의 구조와 기법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신작 <걷는 사자>는 사자를 ‘회화적’으로 묘사한 유화와 선으로 단순화한 드로잉 그리고 드로잉에 시간과 공간감을 부여한 애니메이션이 연결된 작업으로, 회화와 애니메이션 사이의 긴장과 공존의 문제를 고민한다. <뽈뽈뽈>은 화려한 기법이나 정교한 테크닉 대신 회화의 손맛을 그대로 전달하며 매끈하게 잘 다듬기보다 무언가 어색하고 삐거덕대는 날것의 느낌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이들의 작업은 회화의 표현의 경계를 확장하고 회화가 도달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물리적 장치를 보탬으로써 그만큼의 긴 호흡의 전달력을 지닌다.

 

 



시간 혹은 회화: 종합()가능한 양극에 대하여

정강산(독립연구자)


 

<뽈뽈뽈>은 회화와 시간-운동의 관계설정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주제를 동시대의 지형 내에서 고민해보는 스케치적인 전시다. 이러한 전시의 기본 방향은 대략적으로나마 회화사를 훑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회화의 역사에서 시간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 사례는 20세기 초의 이탈리아 미래주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래파 작가들은 도시와 기계, 산업주의적 문명의 역동성에 열광하며 자연스레 움직이는 대상들에 주목했으며, 대상의 잔상을 겹쳐 그리는 방식으로 운동성(시간성)을 표현하는 법을 탐구했다. 이 시기에 제작된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No.2>(1912)는 미래파의 영향 하에서 이뤄졌던 회화의 확장시도를 잘 체현하고 있다. 한편 시간성을 말소하여 평면 자체로 환원된 공간에 대한 탐구야말로 추상표현주의의 요체라 본 그린버그 식의 독해와는 반대로, 추상표현주의의 정점에 있는 폴록의 액션페인팅은 이미 고정된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모더니즘적 회화를 넘어, 순수한 운동의 기록으로서의 회화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무작위로 색을 칠하고 뿌리는 ‘행위(에 따른 시간의 궤적)’ 자체가 작업의 대상으로 전면화 된다. 달리 말해 폴록의 작업은 감상을 요구하기보다, 캔버스 위의 불균질하고 임의적인 안료의 배치를 규정하는- (주체의)운동 자체의 현전’을 보도록 했다. 여기에 우리는 비정형의, 살덩이로 보이는 무언가가 유동성 속에서 전환하고 변용되는 순간들을 그려낸 베이컨(Francis Bacon)의 회화로부터 잠재적 시간(Aion)과 현실적 시간(Chronos)이라는 개념적 시간성들을 통해 형상의 생성에 따른 감각의 시간의 발생을 발견하는 들뢰즈식 사변 또한 추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화의 시간성에 대한 철학적 사변을 논외로 한다면, 미술사 내에서 이뤄진 회화형식과 시간성의 결합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위협받는 회화의 존재론을 재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컨대, “ ‘OO’이후로 회화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려질 수 있는가” 와 같은 질문은 시간성에 대한 역사적인 회화()의 모든 포섭전략의 기저에 있는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본 전시 <뽈뽈뽈>이 취하는 질문 역시 바로 이와 같은 객관적 조건 하에서 요청되는 회화의 확장과 관련된다. 회화의 종별적인 공간을 고수하는 것은 이제 어떤 갱신이 없이는 과거의 시대착오적인 몸짓을 반복하는 일이기에, 직접적인 물리적 시간과 운동이 도입되어야한다는 것(강주형, 이승훈), 혹은 최대한의 기법적 일탈과 실험을 이어나감으로써 평면의 시각적 환영성에 메타적인 작업들을 생산해야한다는 것(김윤섭)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뽈뽈뽈>의 세 작가들은 스마트폰, PC스크린 등 점차 편재하는 디지털 평면에서 상연되는 무빙이미지의 시대에, 회화의 위상을 발본적으로 고찰하고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이는 세 작가 모두 애니메이션과 출신들로서 자연스레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일지도 모른다.


강주형은 인물군상들이 다소 산발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일상적인 풍경을 붓의 터치가 두드러지게 묘사한다. 그것은 어느 대학교의 조감도이거나((2013)), 놀이터이거나((2018)), 나무를 진채 시골의 논밭을 가로지르는 트럭이 보이는 풍경들이다((2020)). 그러나 개별 작업들이 포착하는 장소 각각의 의미와 인물들이 구성하는 서사는 어떤 내적 일관성도 없다. 달리말해 각 작품들을 연결하는 공시성에서, 풍경과 인물들은 임의적으로 선별되어 있다. 이는 집적된 붓터치로 묘사된 대상들을 적절하게(혹은 자연스럽게) 운동시키는 것이 작업 전반의 축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묘사된 대상들은 나름의 동선을 가진 채 꿈틀거리는데, 이전까지의 작업들에서 풍경 전체의 생기를 위해 운동이 외삽되는 측면이 두드러졌다면, 가로수 나무를 단일 대상으로 설정하고 이를 3D 모델링으로 운동시키는 (2020)에서부터는 운동성과 펜 터치의 유기적인 결합에 대한 탐구가 보다 전면화 된다. 3D 모델링 툴을 비롯한 동시대의 재현장치가 허용하는 기술적 조건 하에서 구축 가능한- 자연물의 운동에 대한 자연스러운 묘사, 강주형의 작업들은 이 언저리를 맴돈다.


이승훈 또한 비슷한 관심을 공유한다. 즉 회화를 동적인 것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기획인 것이다. (2012)이 무빙 드로잉이라 할법한 형식으로 발코니의 시간이 변화하는 것을 가볍게 실험한다면, (2020)에서는 붓 터치의 축적을 통해 입체적으로 형성된 여러 신체들의 질감을 운동시키는 방식이 연구된다. 이어 <문앞>(2020)은 단일한 대상-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가는 남성-의 동작 자체를 통해 붓 터치라는 전통적인 작화법과 3D 모델링이라는 재현장치 간의 보다 유기적인 결합을 모색한다. 이승훈에게서도 선별된 장소와 인물들을 관통하는 맥락은 소거되어 있으며, 회화적으로 묘사된 신체의 동작 자체를 자연스럽게 구현하는 것이 쟁점이 된다. 다만 강주형의 작업에서 인물들이 풍경의 후경 혹은 배경으로 배치되는 것과 달리, 이승훈은 인물 및 신체적 운동의 묘사 자체를 보다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적인 신체의 질감과 운동-시간의 가능한 결속, 이는 이승훈이 향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한편 김윤섭은 평면의 환영성을 고수한 상태에서 가능한 기법들을 실험하는 작업들(<광야를 헤매는 광인>(2011), <광야를 헤매는 광인>(2020))과 동시에 환영성 자체를 냉소하는 작업들((2020), <걷는 사자>(2020))을 제출한다. 전자가 잉크 혹은 유화물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시각적 효과들을 전면화하고 있다면(가령 <광야를 헤매는 광인>(2020)에서는 그림 위에 젯소를 덧칠하고 그것이 마른 뒤 남은 붓터치를 다시금 펜으로 묘사하여, 화려하고 난폭한 소용돌이와 같은 형상을 돌출시키는 부분들이 두드러진다), 후자는 환영적 평면 내부에 조야하게 그려진 실제의 애니메이션 스틸컷을 삽입함으로써 전자에 메타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그림판의 낙서 수준으로 조야하게 그려진 <걷는 사자>에 등장하는 사자가 그 회화적 버전인 의 귀퉁이에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에서 충실하게 그려진 대리석 사자 조각상이 드러내는 조형성과 자체의 미감은, 그 고정성으로 인해 자신의 내부에 그려진 짤방과도 같은 조야한 사자의 운동(<걷는 사자>) 보다 주목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김윤섭의 작업은 플래시(Flash) 애니메이션 혹은 점선면의 운동을 가능케 하는 재현장치의 등장 이후 더욱 급격히 상실된 회화의 힘과 붕괴된 회화적 종별성에 대한 알레고리를 나타낸다.


상술했듯, 이들은 회화의 갱신과 이미지의 운동에 대한 당위를 논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조건을 함께 살필 필요가 있다. 1.일찍이 회화적 환영성이 모더니즘 회화에서 공격받았던 맥락에 더하여, 60-7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 등 회화적 아방가르드가 급격히 경매 및 갤러리 제도로 흡수됨으로써 후퇴한 이후 평면의 환영에 대한 메타적 비판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 과정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동시대미술을 거쳐 예술의 시공간 전체가 ‘글로벌 아트’로 통합되고, 일종의 조류로서 회화 사조라 할법한 것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즉 회화의 환영성은 부술 것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런 조건을 무릅쓴 채 회화적 환영성을 재고할 것을 요청하는 김윤섭의 제스쳐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을까. 2.누적된 드로잉의 터치와 3D모델링의 결합이 성공적으로 ‘시간성’을 회화의 장 내로 편입시킬 수 있을지의 여부는 미지수다. 3D모델링을 활용한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은 일찍이 80년대 중반에 단편 분량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낼 만큼의 성과를 거뒀으며, 이는 <토이스토리>(1995)와 같은 대중적 장편영화를 구성해내는 데에까지 거듭났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뒤로 우리는 3D의 모델링의 향연을 마주하고 있다. 편재하는 디지털 평면이 전제하는 무빙이미지의 몰입감을 회화의 장내로 재전유하고자 하는 것이 강주형과 이승훈의 관심이라면, 이들의 “시간 회화”는 통속적인 몰입감에 견주어 형식적으로 어떤 지점에서 단절할 수 있을까.


한편 최근의 대중적인 뉴미디어 전시들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고전이 되는 회화의 장면들 자체를 말 그대로 운동시키며, 그로써 시간을 주무른다. 그러나 거기서 그림은 ‘관람’하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스펙터클한 경험과 체험 자체가 된다. 회화는 성공적으로 ‘무빙이미지’의 대열에 합류하지만, 역사적인 회화의 경향들은 반성되거나 반추되기보다 오히려 이미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순전한 이미지의 표면 자체로 고착되는 것이다. 그때 운동을 통한 시각적 환영성의 극단에서 도달한 것은 회화의 갱신이라기보다는 회화 고유의 반성적 공간의 상실, 혹은 인공호흡기를 단 채 기이하게 수명을 연장한 살아있는 시체(living dead)로서의 뒤틀린 회화이다. 이 모든 것이 회화에 ‘시간성’을 도입하는 시도의 연장에서 이루어진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뽈뽈뽈>의 작가들이 회화에 도입하고자 하는 시간성의 성격에 대해서도 질문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회화는 꼭 움직여야 할까? 그것은 어떤 운동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화의 갱신인가, 회화로의 복귀인가? 회화에 직접적인 물리적 시간성이 도입되는 순간, 회화 특유의 반성적 공간은 소멸되고,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며 작품과의 거리 속에서 반성하는 관람자의 모델 또한 이미 되찾을 수 없는 것으로 전제되지 않을까. 혹은, 이들의 시도는 새로운 관람의 방식을 창안함과 더불어 회화를 성공적으로 연장하는 것이 될 수 있을까. <뽈뽈뽈>은 이와 같은 질문들을 열어 놓으며, 동시대 회화의 재생산 조건을 반추하도록 한다.


 





 


 


정확히-알지-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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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p51, oil on canvas, 61×73cm,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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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원, 당신이 선택하면 된다, oil on canvas, 53×45.5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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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민선, 사이, 캔버스 위에 오일, 112×162cm, 2011


 

빼고 지우고 비운 채 말하는

양효실(미학자)

 

 

빈 캔버스에 반복적인 붓질을 통해 판/(plane)을 만들고 그 면 위에서/안에서 살아갈 이미지나 형상을 올리고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나 삶, 특수한 역사(herstories)를 위한 장소/거주지를 마련하는 일은 관습적으로는 회화로 불릴 것이지만, 다르게 본다면 화가의 건축, 혹은 포이에시스(making)라 불릴 것이다. 미적 제작으로서의 회화는 특별히 화가들 한 사람 한 사람이것의 시각적 증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독특한 보기(seeing)이고 하나의 보기이고 주관적인 보기이고다른보기다. 그것은 사회적이고 집단적으로 약속된 보기를 벗어나면서 시각적 보기를 주관화하고 특수화한다. 물론 그 보기는 화가에게는 일상적 보기이고자연스러운보기일 것이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예외적 상태를 살아가는 화가의 임상적 증상으로서, 심적 동인과논리를 장착한 것으로서 일반인들, 관객들 앞을 점유한다. 그것은 몽상이거나 증상이고, 그렇기에 뚜렷한 원인으로 해소될 수 없는 채 변주/변이될 뿐이고, 선명한 개념이나 지식으로 진정되지 않을, 그러므로 착시나 착각 같은 것으로, 믿을 수 없는 보기로 분류될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작가의 작업으로서, 연속성과 일관성을 통해 계속 제출되기에, 믿을 수 없는 보기이지만 즐길 수 있는 장면으로 도착한다. 지루하고 기계적이고 관성적인 보기를 잃고자 우리는 전시장에 들른다. 우리의 보기에서 너무 멀리 있는 이미지나 제작은 우리를 유혹하지 못할 것이고, 너무 가까운 것은 반갑기는 하겠지만 금방 지루해질 것이다. 유혹으로서의 회화는 너무 가까이나 너무 멀리 있지 않으려 할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관객 개개인의 일상적 보기와 그런 보기에서 이탈하려는 지금 그 관객의 욕망/에너지에 따라 다른 결과를 산출할 것이다. 집단적인 경험으로서의 문화나 예술이 거의 불가능해진 지금에 와서 회화를 경험하는 일반적인 법, 방법도 힘들어진 듯하다. ‘화가의 특수한 보기와 자신의 기존의 보기 사이에서 관객은 협상하는 자이다. 어떤 회화는 다가올 것이고 어떤 회화는 끝내 어리둥절한 채로 지나쳐야할 것이다. 특수한 조건과 법칙에 근거한 하나의 그림의 자율성/자족성을 이해하는/감상하는 일, 하나의 건축/제작으로서의 회화 앞에 서는 일은 내게는 논리적 세계를 잠시 이탈하는, 명료함과 이해가능성의 세계를 잃는 경험이다.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이 이럴 것이라고, 꿈속의 내가 이럴 것이라고, 그저 나의 통제를 벗어난 시간과 공간 속을 떠도는 것이 이런 보기의 전제일 것이라고 되 뇌이면서 나의 논리의 실패와 감각적 이미지의 자율성이나 부유(浮游)를 즐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외면하거나 즐기면 된다. 회화는 후자의 장소이다. 즐기기는 논리와 지성의 실패에 대한 것이고 그런 실패를 나의 무능이 아닌 회화의 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나를 보호할 논리와 법이 없을 때, 나는 기이한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 화가가 건축한/제작한 그 공간을 살게 된다. 그러면 된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왜 이런 구조로 설치되었는지 모른 채로 보고 있는 것을 끝까지 보면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서 함께 있으려고 하면 된다. 겹겹이 칠해진 바닥과 올려진 이미지나 형상 사이를 잘 모르는 내가 살아낸다.

 

 

세 명의 여성 화가의 작업을 묶은 전시 제목이정확히-알지-못함이다. 제대로 올바르게 알지 못함이라는, 앎의 부분적 결핍이나 불완전함을 표식하는 문장이자 한 단어인정확히알지못함은 정확한 앎의 관점에서는 무능이나 결함을 그리고/그러나 가능성이나 새로운 방향을 전제한다. 앎은 설명과 이해, 분석, 공감을 통해 자아의 확장과 축적, 이곳에 의한 그곳의 지배와 통제로 진행된다. 그런 직진과 일방향은 정확히 알지 못할 때 좌절되거나 불안()해진다. 직진이지만 직진이 아니고 일방향이지만 이미 그쪽에서 이쪽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 있게 되기에 상호적이게 된다. 기획자는 자신이 선정한 제목을 두고작가의 개인적인 사건이나 관찰의 대상이 불특정한 장소나 사물로 은유되는 방식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특정한 장소나 시간, 사물에서 비껴나 있는 채로 작가의 개인적인 사건이나 경험이 구조화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화가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그런 부분적인-()의 상태를 지향하는 화면 앞에서 우리는 모른 채로 보기, 보면서 못 보기, 빼면서 더하기, 잃어가면서 얻기와 같은 역설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애매성, 모호성은 정확한 앎에서 이탈하는 것의 가치에 다름 아니기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그러나 대단히 신중한 무대/구조/제작에 의해 나타난 것을보면서덜고 쉬고 부유하고 흐릿해질 수 있다. 중력, 무거움, 확실성, 좌표의 일시적 박탈 같은 것.

 

 

김민조는존재의 확고한 목적이나 특별한 이야기, 깊은 개인의 역사를 갖고 있지 않은인물들, 그러므로 보이는 것, 바깥이 전부인 캐릭터들, 프레임에 소속될 수 없는 부유물들을 그린다. 공기나 유령이나 먼지와 등가인 사람들, 인간으로 보이지만 칠해진 것이라는 사실과 분리불가능한 이미지들이다. “낙오되고 소외된이란 평가적 단서를 달고 있는 인간은 그러나 모두 한결 같이 뭔가를 하고 있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 나무에 매달리거나 나무 위에 있거나 철제 사다리에 앉아 있거나 고가다리에서 도시를 굽어보며 손가락으로 저곳을 가리키는 남자 혹은 사람들. 막 찍힌 장면들이고 과감하게 잘려져 있고 손으로 뭔가를 말하고 있다. 어떤 순간들이 찍히고 그려졌다. 연속성이나 맥락, 시간적 전후관계에서 잘려 나온 듯, 뭔가를 하고 있지만 그 행위 역시 상황에서 잘려난 채로 부분, 단면, 불연속적 쇼트로 존재한다. 이것이 김민조의 보기, 카메라가 포착한 순간에 대한 회화적 번역, 그럼으로써 카메라로는 불가능한 어떤 시간성을 물질화하려는 시도, 그러나 그렇다고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장면은 아닌 순간의 결정화. 실존적 지위를 얻지 못한 채 단면으로/잘린장면들에서 우리는부유하는 삶이란 실존적 언명의 회화적 번역을 보기도 한다.

 

 

이해민선은 서울과 용인을 좌석버스를 타고 오가며 차창 밖 풍경으로 본 것에서 자신의 풍경의 소재를 갖고 왔다. 작가는 그것을 사실적·재현적으로 전달하는 대신에 자신이 본 것에서 어떤공리(公理)’를 끌어내고 그 공리를 시각적 언어로 구체화하는 공정을 거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2011년의 회화는 모두 건설현장같고 버려진장소같고 바다같고 악몽같고 일렁이는들판같은 바탕 면을 조성하고 그 위에서 둘의관계’, 그러나 불가능한 관계, 어쨌든 관계, 불길하게 들러붙는 관계를 제안한다. 부단히 부서지고 세워지고 메워지고 지워지는 개발에 침식당한 서울 외곽의 풍경을보는동시대 작가들의 방법은 당연히 많다. 이해민선에게 재현적사실은 시간성을 함축한 찢어지고 파묻힌 검정비닐이나 풍경의 일부로 살아가는 수도관 같은 부분 이미지에서 드러난다. 이런 것들이 이해민선의 ()재현적 회화를 현실과 연접하게 만든다. 그러나 목재소에서 막 갖고 온 것 같은 각목이나 나무 토막은 풍경과 연접하는 바깥으로서, 하나의 관념으로서, 불가능한 대상으로서 그녀가 본 것에 개입/침입한다. 죽었건 살았던 나무였어야 할 그것이 가공된, 인위적인, 초현실적인오브제로서 화면에 놓여 있다. 이런 접합, ‘꼴라주’, 병치로 인해 화면은내부로 수렴되지 못하고 바깥으로 이쪽으로 넘어오게 된다.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일상적 경험이나 지각이 마침내/기어이 찾아내고야마는 관계의 기적이나 소박함이나 따듯함이 아니라개체가 자신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 상호작용하는데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개체와 개체가 서로에게로 혼융되는 예의 유기적 생명체의 관계-맺기가 아니라 자기성을 잃지 않은 채 공존하는 작가의 심적환상이 상연된다.

 

 

노정원의 풍경은 그나마 내가 어느 정도는 접근할 수 있는정확히-알지-못함에 대한 것이다. 저런 장소에 나도 가봤다. 꿈 속에서건 (일부러)길을 잃었던 어느 도시에서건 심지어 지금 여기 서울에서도 마음을 둘 곳 없어서 걷기만 하다보면 꽉 찬 건물들, 사람들 사이에 숨은 듯 접힌 듯 저런 곳이 나온다. 현실의 일부이면서 현실의 음화같고 현재이면서 이미 과거같은 그런 뒤떨어지고 잊혀진 곳이 집요하게 공존, 공생한다.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수원에서 저런 실재하는 장소, 공간들을 줄곧 마주치고 있다고 한다. 개발과 번쩍임, 소란스러움, 생기 바로 뒤켠에 바로 옆에 저런 고요, 정지, 불길함, , 미미한 숭고가 엄존한다. 단지 우거진 자연도 단지 빽빽한 건물도 아니어서, 한 두 그루의 나무와 건물이, 덩어리 숲과 덩어리 건물이 대치, 공존, 융합한 이 풍경에서라면 인간은 아주 미미하고 보일 듯 말듯하게 자리할 것이다. 맨 하단에 작게 자리한 자동차가 인적, 체온을 현시하는 그런 곳. 부드럽게 뭉개진 저채도의 색채/물감 덕분에 고립과 고독에 대한 것이어도 충분한 이 풍경은 마음이나 감정을 놓을 수 있는 좋은 무대로 작동한다. 비었거나 고요하거나 적막한 곳에서는 비로소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감정이나 마음이 주연인 것이다.

 




 


 

정확히-알지-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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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알지-못함
김민조 노정원 이해민선


2020.7.3 - 8.6
- 10:00-18:00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111, 301
031-955-1595


새로운 회화 작업에 대한 지속적인 리서치에 기반한 회화 프로젝트의 연장으로 <행복의 뒷맛>(사박, 송승은, 정주원)에 이은 올해 2번째 기획전이다. <정확히-알지-못함>은 작가의 개인적인 사건이나 관찰의 대상이 불특정한 장소나 사물로 은유되는 방식을 다룬다. 우거진 숲 사이로 보이는 이질적인 건물, 본래의 쓰임을 다하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공간, 자연을 지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자연 등 낯익음과 낯설음이 동시에 다가오는 풍경들이다김민조는 시간과 경험의 축적에 따라 변형되는 기억의 가변성을 이야기한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진흙의 미끈한 물성과 같이 경험과 기억은 절대성을 담보하지 않으며 형태는 유연하게 재가공된다. 이해민선의 관심은 오랜 기간동안 산, , 흙과 같은 실재의 자연물에 머물렀다. 작가는 매일 마주하는 대상의 속성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의 반복되는 재생과 소멸의 에너지를 화면에 담는다. 자연물과 인공물 그리고 인간의 내면이 빚어내는 풍경의 재배치는 결코 대립적인 구도가 아니며 조화와 균형, 변형, 변화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생성해낸다. 노정원은 불특정한 장소와 불분명한 인물의 모호성에서 오는 의문과 불안의 감정을 절제된 색과 형태에 밀도 있게 담는다. ‘아름다운 표정과 언어는 거짓이고 우리들의 비밀은 언제나 잘 감춰져있다작가의 관점처럼 특징이 지워진 장소와 텅 비어있는 인물의 표정 등 매우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농밀한 여운을 남긴다.



 

곽경수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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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수 개인전

2020.5.22-6.25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111, 301

- 10:00-18:00

031-955-1595

 

<곽경수 개인전>은 마영신 작가의 다음웹툰 <아티스트> <곽경수의 길>의 주인공 곽경수가 실제 전시를 연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전시이다. 이혼한 중년의 미대 강사인 곽경수는 작품 활동보다 미술계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연줄을 대기에 급급한 ‘꼰대 예술가’이다. 곽경수는 동료 작가 신득녕의 재기를 통해 작가로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비로소 진짜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곽경수가 과거에 자신이 그린 그림 위에 새롭게 드로잉을 더한 작업과 추상작업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새 작업을 포함한 10점의 신작과 김오키 새턴발라드와 협업한 <곽경수 오케스트라>의 애니메이션, 곽경수가 탄생하게 된 작품 <빅맨> 등 곽경수라는 캐릭터의 탄생과 관련한 마영신 작가의 이전 작업을 아카이브룸에 함께 전시한다. 또한 만화 <아티스트>에서 곽경수의 아는 형으로 등장하는 박민규 소설가가 개인전의 서문을 집필하고 곽경수의 친한 동생인 김오키 새턴발라드(김오키 진수영 정수민)의 새 앨범 <곽경수 오케스트라> 공연을 선보이며 <아티스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 실제로 구현된다.

마영신 작가는 <19년뽀삐> <남동공단> <벨트 위 벨트 아래> <삐꾸래봉> <엄마들> <연결과 흐름> <콘센트> 등 현실적이고 사회성 짙은 만화를 연이어 발표했다. 최근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2020, 창비) 시리즈 중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아무리 얘기해도>를 출간했다.


 

[곽경수 개인전에 부쳐]

그림자라는 그림의 그림자

박민규(소설가)

 

피카소는 ×도 아녜요. 곽경수를 처음 봤을 때 그가 건넨 말이다. 20년도 훨씬 넘은 일인데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그는 그림을 그린다고 했고 초면인 나에게 진짜 또박또박 그렇게 얘기했다.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쉴 새 없이 미술의 본질, 뎃생의 역학에 대해 역설했고그런 면에서 피카소는 너무 나이브하다고 했다. 며칠 째 씻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그는 역시나 그림을 그리다 나왔다고 했다. 결코 나이브하지 않은 땀냄새와 암내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스로의 예술혼을 확인한 적 있냐고 내게 물었다. 예술혼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나는 왠지 야단을 맞는이 아니라, 실제로 대화 도중 잉베이 말흠스틴(스웨덴 출신의 기타리스트)을 잉위 맘스틴이라고 했다가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아무리 작은 오점도 그는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안주를 많이 먹었다. 그리고 풋,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띄워가며 그렇게 말한 것이다. 피카소는 ×도 아녜요. 다리를 꼬고 엉덩이를 잔뜩 뺀 특이한 자세로 한 말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래서 그를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잊으려 해도). 방송이니 잡지니, 아무튼 살면서 피카소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절로 그 친구, 곽경수를 떠올려야 했던 것이다. 그 존재감마치 나를 잊지 말아요 주문이라도 건 것처럼 피카소를 생각하면, 또 예술을 생각하면 그 친구 지금은 뭐하나? 절로 곽경수의 근황이 궁금한 것이었다. 세월은 잉위, 아니 잉베이 말흠스틴의 손가락보다 빨랐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0년이나 시간이 지나서였다. 역시나 우연한 술자리였는데 동명이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다. 우선 풋, 입바람으로 띄워올릴 앞머리가 사라졌고 그래서인지 핏, 사사건건 비아냥대고 조소를 날리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다리를 꼬거나 엉덩이를 잔뜩, 뒤로 빼지도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살이 쪘는데 또 이상하리만치(그 몸으로) 행동은 잽쌌다. 모 대학의 미술교수가 오자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를 이동하고 처세를 시작했다. 인생은 포드론 저글링이지. 의미가 불분명한 말을 하며 윙크를 하기도 했다. 요즘도 그림 그리냐고 내가 묻자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대학일이 너무 바쁘다고 했다. 그는 시간강사를정확히는 시간강사 자리를 따기 위한 어떤 일들, 또 지금 자신이 추진 중인 여러 일들을 세 시간에 걸쳐 설명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웩, 웩 연남동 어느 후미진 골목에서 속을 게워내는 그를 보며웅크린 그의 육중한 등을 손으로 두들겨 주며인생은 포드론 저글링이 아니라 실은, 포드론으로 울트라리스크를 뽑아야 하는 버겁고 힘든 미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날 곽경수는 눈물을 보였다. 초면은 아니지만 10년만에 만난 내 앞에서 엉엉 울었다. , 나는 세상을 용서할 수 없어. 그가 말했다. 많이 취했네,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새벽이었다. 그후로

그리고 이따금 그는 전화를 걸어왔다. 때로는 지친 목소리, 때로는 취한 목소리였고때로는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감안하건대 싱크대에서 소변을 보며 걸어온 전화였다. 언제나 형 소설 잘 읽고 있어요,로 시작하는 대화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내 소설을 읽을 리 없다는 사실을그리고 대화의 끝은 언제나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큰 금액은 아니었다. 피카소도 누군가의 돈을 빌려야 했던 순간이 분명 있었겠지. 그렇게 다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차마 거절하기 힘든 소소한 액수의 돈이 울트라리스크 정도의 덩치가 되자 그는 연락을 뚝, 끊었다. 피카소도 분명 누군가와 연락을 끊어야 했던 순간이 있었을테고 아니, 그보다는작업은 잘 되가? 입버릇처럼 인사를 건네 온 나의 작태가 심히 후회되고 미안하였다. 그렇다고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이제 무슨 말을 해도 돈을 갚으란 소리로 들릴 것 같아 나는 차마 수화기를 들지 못했다. 한참 후 곽경수가 내 욕을 심하게 하고 다닌다는 말이 들려왔다. 운명처럼 피카소의 그림이 경매에서 기록을 갱신했다는 뉴스가 외신으로 전해진 날이었다. 마치 기록을 갱신하듯

그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저께였다. 무슨 만화도 아니고느닷 없이 자신의 개인전 소개글을 써달라는 전화였다. 20년 전의 그날 밤처럼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는데, 미술을 알고 말고를 떠나서돌아보니 여태 한 번도 그의 그림을 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래도 어쨌거나 그간 열심히 그렸구나, 말을 건네자 이제부터 그려야죠! 초현실적이고 입체파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이 존재감결국 만나서 얘기하자, 대화를 마무리 짓고 나는 간만에 또다시 그를 볼 수 있었다. 동명이인은 아니지만 그는 그 사이 또 분명 다른 인간이 되어 있었다. , 핏 하던 입버릇은 사라지고 소소한 돈을 빌려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눈빛이 변해 있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눈빛도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상을 용서한 것은 아닌데

 

다만 경수는

비로소 자기자신을 용서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날 경수는 말했다.

, 내가 살아 온 그림자 속에

그림이 있더라구요.

이제 그게 보이더라구요.

 

그림에 대해 내가 뭘 아나, 그러니 이 이상한 소개글을 정리하자면모월 모일(언제라고 말도 해주지 않았다, 이 존재감!) 경기도 파주의 어느 갤러리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에 당신을 초대하기 위함이다. 그의 그림이 어떤지 나는 모른다. 우선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고또 알게 뭐냐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좋은 그림인지 뭔지 나는 모르겠고다만 이것이 비로소 자신을 용서한 인간의 그림이다, 라고는 말하고 싶다. 피카소도 스스로를 용서한 순간이 있었을까? 아니면 어느 봄날, ×도 아닌 인간들이(피카소 포함) 우루루 모여 누군가의 그, 용서의 흔적을 지켜보는 일도 그리 어이 없는 일은 아닐 거란 생각에 그저 무심코 몇 자 끄적여보는 것이다. 경수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인간도 저런 인간도

 

그러니 당신도

부디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림자를 가진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의 그림을 가진 화가이며

그러니 그

그림자라는 그림을 위해

 

그저 봄날

단 하루


 

행복의 뒷맛: 사박 송승은 정주원

2020.3.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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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첫 번째 기획전 <행복의 뒷맛>은 회화의 새로운 경향을 모색하기 위한 지속적인 리서치를 기반으로 기획되었다.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문제를 영민하게 다루는 전략적인 작업들 사이에서 사박 송승은 정주원의 회화는 그와는 조금 다른 결을 보인다.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기 이전에 그린다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먼저 진지하게 살핀다. 왜 그림을 그리느냐는 상투적인 질문에그리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모르겠다는 우문현답과 같은 말이 돌아온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리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린다는 말처럼 적절한 작가의 변명은 또 없을 듯하다.

사박은 일상에서 수집한 사소한 이미지를 모호한 풍경으로 그려낸다. 짧은 콘텐츠에서 쉽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수많은 이미지들, 반복되는 매일의 어느 한편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대상을 향한 연민이자 그가 머물렀던 공허한 시간을 향한 애도의 행위이다. 송승은의 작업은 개인적 경험과 기억의 공백에서 피어나는 의구심과 상상이 더해지는 과정에서 생산된 양가적 이미지다. 동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독의 음모와 다이닝 테이블 위를 오가는 의심과 경계의 뉘앙스가무섭지만 귀여운이미지로 소환된다. 정주원은 <엄마, 미술해서 미안해> 라는 인상적인 전시 제목을 통해 회화 작가로서 지속 가능한 삶의 형태를 고민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또 다시무엇을 그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유령과 별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은 누구나 볼 수 있고, 유령은 보이지 않으며 간혹 누군가에게만 특별하게 목격되는 존재이다. 작가는 유령과 별 사이 어느 지점에 있는 작가로서의 입장을 고민한다.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먼 발치에서는 현실적인 문제를 등지고 짐짓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삶처럼 현실적인 문제에 집요하게 파고드는 치열한 삶도 없을 것이다. 헤르멘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묘사한행복의 뒷맛처럼 질서와 안전이 보장된 안락한 세계와 슬픔과 폭력이 만연한 불안한 세계는 고작 문 하나를 두고 한 발치 간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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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박, 목장갑, acrylic on canvas, 30×30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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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은, 프린스, oil on canvas, 34.8×27.3cm,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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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원, 별천지, oil on canvas, 170×192.5cm, 2020



세 우주를 따로보기, 혹은 겹쳐보기 


박지형(독립 큐레이터)


 


본 전시에 관한 원고를 청탁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세 작가가 보여주는 회화의 외형적인 유사성이나 여성, 페인터, 신진 작가 등의 코드를 가지고 이들을 범주화하지 않도록 유의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칫 각자의 세계를 축소하고 납작한 일반론적인 감상을 이끌어낼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쉬이 드러나는 공통의 요소로 세 명의 목소리를 섣불리 연결 짓기보다, 각자의 작업이 위치하고 있는 그곳에서 발화하는 것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지금 그들이 다른 무엇이 아닌 회화를 매체이자, 소재이자, 주제로 다루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에 관한 일관된 호기심을 유지하기로 한다.     


사박의 작업 세계는 범람하는 이미지와의 접촉 경험에서 시작된다. 먼저 필요한 과정은 무수한 형상들이 출몰하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가 충분히 헤매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인터넷에서, 출판물에서, 집과 직장에서, 서로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시각 정보의 더미들이 급물살을 타고 움직인다. 그중에 많은 것들은 의미 없이 흘러가버리므로 내 주변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 망각되지만, 가끔 어떤 것은 사고의 그물망에 걸려 한동안 누군가의 주위에 맴돌며 기억에 각인된다. 이렇듯 매일의 시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끄는 이미지들을 걸러내어 수집하는 일이 계속된다. 쌓인 정보들은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한 종류이다. 걷다가 본 풍경, 인스타그램에서 저장한 사진, 퇴근길 마주친 광고판 등 그 출처도 다양하며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이 포함된다.


본인과 특별한 연결고리가 없던 중립적 시각 정보는 회화라는 형식을 통해 비로소 작가와 모종의 관계를 맺을 기회를 맞는다. 그러나 이마저도 아주 순간적인 접속에 그치는 듯하다. 그는 오랫동안 그 이미지를 들여다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을 갖기보다, 그 대상으로부터 파생되는 아주 처음의 인상을 빠르게 화면으로 옮겨낸다. 별도의 사전 작업 없이 날것의 감각을 즉흥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한 장면 위에 오래 머무르기를 택하기보다 속도감을 유지하며 금세 다른 그림으로 초점을 이동시켜 가는 것은 발견한 대상과 사용자 간의 긴밀한 서사의 부재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그는 이미지를 우연히(혹은 어쩌다가) 얻은 것에 불과하므로, 작업을 해가는 과정에서 다루는 사물의 형상을 특별히 사적인 것으로 소급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작위적이고 지나친 느낌을 자아낼 수 있다는 의구심 때문이리라따라서 작품에서 보이는 것은 형태의 껍데기에 기대어있는 감각의 그림자에 가깝다. 작가는 다루는 대상들이 때로 자신과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도, 반대로 거리감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오늘날 경험하는 세계 그 자체를 대변한다고 설명한다. 즉 각 이미지를 그려냄으로써 표면 위로 슬며시 드러나는 것은 한 사람이 작금의 시대를 물리적으로 겪으며 감지한 인상의 단편들이다. 때로 그것은 물질적인 소비를 넘어 개인, 집단, 사회 간에 일어나는 소모적 행태에 대한 인식이기도, 이로부터 기인하는 소외와 공허의 감정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에게 회화는 단순한 모사나 객관적 기록을 넘어 도시적 환경을 소화하고 감각하는 눈이 되어주고 있다


한편 송승은은 이해의 간극, 거짓, 위선과 긴장 등 복잡다단한 감정의 교차들이 유발하는 모호한 순간을 회화로 그린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다층적인 인상들을 주관적 이미지로 확장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주변의 인물과 환경, 집단과 마주하는 상황에는 언제나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지대가 있다. 이는 아주 가까운 인간관계에서도, 또 아주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상황에서도 불쑥 등장하며 한 개인과 외부적 요소들 사이의 거리감을 일깨운다. 작가는 일상 속에서 겪는 사소한 예외적 경험들로부터 발화한 문장과 감정들을 화면에 옮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종의 상상력과 연출이 동원된다그는 주로 임의의 사건을 머릿속에 가정하고 그곳에서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대상을 상상해서 그리거나, 영화나 소설, 동화에 등장할법한 사건의 한 순간을 끌어온다. 따라서 작품에는 인물의 동세나 벌어지고 있는 어떤 상황이 도드라진다. 보는 이는 제시된 이미지로부터 서사를 파악하려 하거나 분리된 캔버스들 간의 인과관계를 읽어내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소녀>, <저녁 식사> 등 작품의 제목도 드러난 대상 외에 추가적인 정보를 주지 않을뿐더러, 사건의 정황 역시 빠른 붓놀림으로 다소 흐려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껏해야 화면이 자아내는 색감, 분위기, 인물의 표정 등을 단서 삼아 주어진 그림들 간의 연결고리를 머릿속으로 재구성해볼 뿐이다


사실 작가 역시 구태여 사건의 결말을 찾아가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객은 그 가상의 서사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을 의무가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드러난 이미지들 사이에 새겨진 감정적 상태에 관한 솔직한 고민들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관찰하며 느끼는 괴리감, 소속된 집단에서 각자의 삶의 방향을 고민하며 공유되는 불안함, 새롭게 경험하는 사회로부터 오는 위선과 긴장감. 이 수많은 감정의 교차 속에서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때는 언제이며,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 걸까? 관계의 얼개와 모호한 감정의 진폭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반복되는 질문들은 미묘한 긴장감을 주는 붓끝의 빠른 움직임들로 화면 위에 응축된다. 그는 A Z라는 양극단과 그 사이의 무수한 중간지대에 존재할 이름 없는 감정들의 발화점을 포착하며 세계를 조금씩 읽어나간다


반면 정주원 작가는 스스로를 그린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처한 작가적 상태를 고심하고 그것을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다. 무엇보다 작가로서 누구나 갖고 있을 근원적인 의문과 딜레마들이 반복적으로 제기된다. 나는 지금 왜 작가일까.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작가로서의 성공이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무엇을 그려야 하고 왜 그려야 할까. 이제 막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결정한 젊은 작가에게는 더없이 막막하고 멀게 느껴지는 질문들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명쾌한 해답지를 서둘러 찾기보다 느리게 에둘러가는 방법을 택하고, 그 시간 속에서 솔직한 목소리를 이끌어내는 과정에 집중한다최근에는유령이라는 대상의 사회문화적 함의를 탐구하고 이를 본인의 작가적 위치에 대입하는 방식으로 내적인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관찰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유령은 현실의 귀퉁이 어디엔가 있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대상이며, 누군가의 세상에는 아예 없는 허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유령같은이라는 표현을 눈에 잘 띄지 않아 파악하기 힘든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별은 상대적으로 하늘이라는 공간에 위치함이 명확하며, 인간은 그것의 반짝임을 동경하고 이상화한다. 따라서 별(star)은 어떤 특별한 대상을 지칭하기 위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상징은 사실 언제 나타나고 사라질지 모른다는 점에서, 또 밝음보다는 어둠과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정주원은 양가적이고 가변적인 두 대상의 개념을 작가라는 정체성의 의미로 치환하고, 자신을 별과 유령 사이 언저리 어딘가에 반복적으로 위치시키며 작업을 이어나간다. 별과 유령은 그의 상상력이 더해진 장면 속에서 산발적으로 흩어지고 작은 탑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서로의 모습을 비추며 먹먹한 색이 겹쳐진 하늘과 땅을 점유하는 풍경이 된다. 별에 더 가까이 닿고 싶은 마음과 그와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은 유령 같은 동료들로부터 얻는 위로의 감정은 분리되지 않은 채 뒤엉켜 한 화면 위에서 공존한다. 아마도 그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한 자아의 실존을 매일같이 질문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면서,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보편의 이야기를 해나갈 수 있는 창을 하나씩 열어가는 일이 아닐까
요컨대 세 명의 젊은 작가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이는 세계와 분리된 개별적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기록이기보다, 여러 타자와 장소, 환경들과 연결된 사회적 존재로서 갖는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곧 이는 개개인이 속한 여러우리들의 목소리를 파편적으로 대변하기도 한다.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함에서 오는 삶의 불투명함, 여러 다른 집단과 마주하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겪는 관계의 모호함, 반복되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단상들에 관한 기억. 이 모든 것이 뒤엉키고 겹쳐지며 저마다의 이야기가 된다. 그림이 되어간다.

(Continued)

윤상윤 개인전: Mean old world

03-1.jpg

Mean old world

윤상윤 개인전

 

2020.1.31-3.5

아트스페이스 휴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111, 301

- 10:00-18:00

031-955-1595

 

윤상윤 작가는 비가시적으로 화면을 본능(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로 분할하여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인물들의 군집을 드러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선보였다. 그의 이전 작업에는 일관적으로 물이 등장하는데, 인물을 투영하는 일렁이는 물은 자아와 본능 사이를 유동적으로 흐르며 화면의 긴장을 와해한다. 작가에게 가시성과 비가시성, 개인과 집단, 이성과 본능, 언어와 비언어 등 이분법적 구분에 따른 아이러니함은 늘 중요한 화두였다. 이번 전시 는 작가가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드린 드로잉 작업에 집중한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구성의 오른손 회화와 대비되는 왼손 드로잉은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길들여지지 않은 작가의 순수한 본능과 감각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전시제목 Mean old world는 미국의 블루스 기타 연주가 T-Bone Walker의 대표적인 곡이다. 작가는 60-70년대 히피들의 자유 분방함에서 ‘잔인하고 고루한 세상’을 살아가는 정신적 해방구를 찾는다. 물질 문명과 기존의 질서를 부정한 반사회적 히피 문화의 특성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미숙한 왼손을 선택한 것과 유사한 지점을 향한다.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설득이 되지 않는 세상을 견뎌내기 위해서 때로는 모든 긴장을 대책없이 내려놓을 필요가 분명 있기 때문에.

This is a mean old world, baby to live in by yourself.